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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의 보따리와 몸의 정치학

by memo5983 2025. 5. 28.

김수자(Kimsooja, 1957~ )는 한국을 대표하는 국제적 현대미술 작가로, 퍼포먼스, 설치, 영상,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몸’과 ‘이동성’, ‘정체성’, ‘여성성’에 대한 깊은 탐구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업은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동시에, 전 지구적 문제 ― 이주, 경계, 젠더, 문화적 정체성 ― 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시각 예술로 풀어냅니다. 특히 그녀가 자주 사용하는 모티프인 '보따리'는 단지 물리적 오브제가 아닌, 이주의 기억과 여성의 노동, 억압과 저항의 상징으로 기능합니다. 본 글에서는 김수자의 ‘보따리’ 작업이 갖는 상징성과 그녀가 전개한 ‘몸의 정치학’에 대해 살펴봅니다.

보따리 – 기억, 이동, 여성성의 상징

김수자의 대표적 조형 언어인 ‘보따리’는 전통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천으로 감싼 짐꾸러미에서 출발합니다. 그녀는 1990년대 후반부터 이 보따리를 자신의 설치와 퍼포먼스 작업의 중심 소재로 활용하기 시작했으며, 그 안에는 개인적 역사와 집단적 기억, 사회적 맥락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보따리는 움직임과 정착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이주는 정주하지 못한 상태, 혹은 억지로 밀려난 삶을 의미하는데, 김수자는 보따리를 통해 이러한 정체성과 경계에 대한 문제를 시각화합니다. 특히 여성의 삶, 가족, 가사 노동, 이주의 경험은 그녀의 보따리 안에 상징적으로 포개어집니다. 그녀는 보따리를 ‘몸의 연장’으로 보며, 그것을 메고 움직이는 수행적 행위 자체를 예술로 전환합니다.

퍼포먼스 “Bottari Truck”에서는 실제 보따리를 트럭에 싣고 한국의 도시와 시골을 가로지르며 이동했습니다. 이 작업은 단순한 이주의 재현이 아닌, 이동 그 자체를 시각 언어로 변환하는 미학적 시도였으며, 국가와 여성, 역사 사이의 권력 구조를 은유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보따리는 이렇듯 삶의 흔적이며, 이동하는 정체성이자, 몸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몸의 정치학 – 행위와 침묵의 퍼포먼스

김수자의 예술은 ‘몸’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동시에, ‘몸’ 자체를 사회적·정치적 발언의 주체로 전환합니다. 특히 그녀는 언어보다 더 강력한 침묵의 몸짓, 시선, 정지, 느림 등을 통해 관람자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보다는 사유와 체험을 유도합니다.

대표작 “A Needle Woman” 연작은 세계 여러 도시의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자신의 뒷모습을 장시간 고정 카메라로 촬영한 비디오 퍼포먼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빠르게 지나가는 도심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그녀의 ‘등’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몸의 저항성, 정체성의 고립성, 여성으로서의 존재성을 은유합니다.

이 작업에서 ‘몸’은 발화하지 않지만, 강력하게 말합니다. 그녀의 등은 사회 구조와 시스템, 도시 속 개인의 고독, 여성의 위치를 응시하게 만듭니다. 그 몸은 억압된 주체이면서도, 침묵 속에서 가장 강력한 시선으로 사회를 응시하는 정치적 존재입니다.

김수자는 몸을 조형적 도구가 아닌,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존재로 인식합니다. 이는 퍼포먼스가 단지 시각적 제스처가 아닌, 철학적 행위로 기능한다는 점을 의미하며, 그녀의 작업은 미술, 수행, 명상, 저항이 결합된 복합적인 구조로 전개됩니다.

이주와 경계, 여성의 위치를 사유하는 예술

김수자의 예술은 국경과 문화, 젠더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보편적 문제의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녀는 동양과 서양, 중심과 주변, 남성과 여성, 정주와 유목 사이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 질문을 조형화합니다.

그녀의 작업에는 이주민, 여성, 소외된 집단에 대한 깊은 공감이 담겨 있으며, 보따리는 그들의 존재와 기억을 안고 이동하는 매개로 기능합니다. 김수자는 "보따리는 단순한 짐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역사를 싣고 이동하는 또 하나의 몸"이라 말하며, 이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사회 구조와 맞닿을 수 있는지를 탐색합니다.

또한 그녀는 퍼포먼스를 통해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경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침묵의 차원에서 예술의 감각을 열어 보입니다. 몸은 움직이거나 정지하며, 사운드와 향기, 천과 이미지로 구성된 공간 안에서 예술과 사회, 개인과 집단, 여성과 세계를 연결 짓는 정치적 도구가 됩니다.

그녀의 작업은 미술관이나 전시장을 넘어 도시 공간, 일상, 영상 속으로 확장되며, 예술이 삶의 흐름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김수자의 예술은 시각적이면서도 체험적이며, 미묘하지만 강력한 질문을 남깁니다.

 

김수자는 보따리라는 일상적 오브제와 자신의 몸을 매개로, 정체성과 이주, 여성성과 권력 구조를 비판적이고 시적으로 탐구한 예술가입니다. 그녀의 작업은 물리적 조형을 넘어서 시간, 공간, 사회를 관통하는 수행적 행위로 확장되며, 예술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녀의 보따리는 단지 짐이 아닌 역사이고, 그녀의 몸은 단지 조형이 아닌 언어입니다. 김수자의 예술은 오늘날 복잡한 정체성과 사회적 긴장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과 사유의 여지를 남겨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