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 1958~ )는 콜롬비아 출신의 현대미술 작가로, 사회적 폭력과 상흔, 기억과 애도의 문제를 시각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는 조각과 설치 작업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예술가입니다. 그녀의 작업은 전통적인 조각 개념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공간에 사회적 기억을 새겨 넣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물리적 공간을 감정과 역사의 장소로 전환합니다. 살세도는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지 않지만, 그들의 부재를 ‘존재의 흔적’으로 남기며 관람자에게 깊은 감각적, 윤리적 성찰을 요구합니다. 본 글에서는 도리스 살세도의 공간 조각이 사회적 기억을 어떻게 시각화하고, 공간을 어떻게 감정의 장으로 전환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상흔을 새긴 공간 – 흔적의 조각화
도리스 살세도의 대표적인 설치작 “Shibboleth”(2007)는 런던 테이트 모던의 터바인 홀 바닥에 167미터 길이의 균열을 낸 작업으로, '공공 공간에 새겨진 부재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사례입니다. 이 균열은 인종, 계급, 이민자 문제 등 사회적 경계와 분열을 은유하며, 감춰진 폭력과 차별의 구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관람자는 이 바닥의 틈을 지나며, 공간의 완결성이 깨졌음을 직감하고, 그 틈을 바라보며 자신이 디디고 선 땅의 역사를 되묻게 됩니다. 균열은 단지 시각적 자극이 아닌, 육체적 경험으로 체화되는 상흔이며, 이로써 살세도는 조각이 단단한 물체가 아닌 '사회적 기억을 새기는 행위'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그녀의 다른 작업 “Atrabiliarios”(1992~)에서는 실종된 여성의 신발을 반투명한 동물성 막으로 덮어 벽 속에 매립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는 실종자의 존재를 애매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보이지 않음이 더욱 강렬한 존재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이러한 ‘은폐된 기억’을 조형적 언어로 재현함으로써, 예술이 사회적 공감과 애도를 실천하는 공간이 되도록 유도합니다.
조각에서 행위로 – 공공성과 정치적 예술
살세도의 작업은 갤러리나 미술관의 내부 공간을 넘어, 공공장소와 일상적 공간으로 확장됩니다. 이는 그녀가 예술을 일상과 분리된 미적 객체가 아니라, 공공의 상처를 드러내는 정치적 실천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설치는 종종 사회적 사건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실질적인 기록, 인터뷰,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됩니다.
예를 들어 “Noviembre 6 y 7”(2002)은 1985년 콜롬비아 대법원 인질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보고타의 사법청 건물에 흰색 의자 280개를 수직으로 설치한 퍼포먼스입니다. 이 작업은 예고 없이 시작되어, 매일 한 줄씩 의자가 더해지며, 점진적으로 상실의 감정을 드러냅니다. 시간성과 반복, 감정의 누적이 결합된 이 작업은 조각이 물질의 형상이 아닌 ‘집단적 기억의 의례’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살세도는 예술을 통해 사회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상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드는 윤리적 예술을 실천합니다. 그녀의 조각은 아름답거나 장엄한 대신, 조용하고 단호하며, 폭력과 죽음에 대한 비명을 ‘속삭임의 형식’으로 전달합니다. 이로써 관람자에게 수동적 감상을 넘어, 감정적 증인이 될 것을 요청합니다.
부재의 조형 – 사회적 애도의 미학
살세도의 작품은 ‘부재’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녀는 구체적인 형상을 만들기보다는, 결여된 존재, 사라진 기억,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를 공간에 각인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이는 미술사적으로도 독창적인 전략이며, 조각의 역할을 ‘존재의 기념’에서 ‘부재의 감각화’로 전환시킨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대표작 중 하나인 “Disremembered”(2014)는 수천 개의 바늘로 이루어진 얇은 천 조각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천은 피폭, 폭력,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하는 극도로 불안정하고 취약한 구조를 지닙니다. 이는 상처 입은 신체와 사회의 기억을 연결하고, 감각과 윤리가 만나는 조형 언어를 형성합니다.
그녀는 또한 비폭력적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합니다. 직접적인 비판이나 표어 대신, 공간 안에 남겨진 상흔, 침묵, 결여를 통해 무언의 저항을 시도합니다. 이는 예술이 발화보다 ‘경청’의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하며, 관람자의 해석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예술적 장치를 구축합니다.
살세도의 작업은 사회적 비극에 대한 무력한 침묵을 조각적 언어로 바꾸어내며, 감추어진 역사와 목소리를 서서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형 예술의 윤리적 가능성을 확장합니다.
도리스 살세도는 조각을 통해 사회적 기억을 공간에 새기고, 감정과 윤리를 감각화하는 동시대 예술의 선구적 작가입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사회적 상흔과 집단적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감정적 구조물이며, 관람자가 예술을 통해 증인이 되도록 만드는 통로입니다.
그녀는 예술이 현실을 치유할 수는 없어도, 망각되지 않도록 ‘기억을 위한 장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도리스 살세도의 공간 조각은 바로 그 믿음을 시각화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누구를 기억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