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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롱의 걷기 예술과 자연의 시간성

by memo5983 2025. 5. 27.

리처드 롱(Richard Long, 1945~ )은 영국 출신의 대표적인 대지미술 작가로, ‘걷기(Walking)’를 예술 행위로 끌어올린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연환경을 캔버스 삼아 몸의 움직임과 시간의 흔적을 예술로 기록하며, 미술의 정의를 근본적으로 확장했습니다. 리처드 롱은 자연 속에서 돌을 옮기고 선을 그으며, ‘작품’이란 그 장소와 행위, 시간이 결합된 사건이라는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물리적 조형보다 비물질적인 경험과 시간성, 공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강조하며, 현대미술에서 ‘행위 기반 조형언어’의 전범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리처드 롱의 걷기 예술이 지닌 미학적 특징과 자연 시간성의 철학, 그리고 조형 방식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걷기 예술의 출현 – 몸, 자연, 공간의 교차

리처드 롱의 예술은 회화나 조각처럼 '보여지는' 예술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67년 영국에서 진행한 A Line Made by Walking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습니다. 이 작업은 잔디 위를 반복해 걸으며 눌러 만든 하나의 선이었고, 이 흔적을 사진으로 기록해 전시장에 제시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내가 자연 속에서 했던 조용한 행동”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롱은 자연 속을 걷고, 주운 돌이나 나뭇가지를 이용해 간결한 선이나 원형 구조를 만들며, 장소의 에너지와 자신의 존재를 연결시켰습니다. 그의 작업은 일종의 시간의 흔적이자, 공간과의 직접적인 대화입니다. 그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몸을 중심으로 ‘걷기’라는 행위 자체를 하나의 예술 언어로 삼았습니다.

걷기라는 행위는 인류가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공간을 경험하고, 땅과 관계를 맺는 방법입니다. 리처드 롱은 이를 예술의 방법론으로 가져오며, 기존 조형예술의 물질 중심주의와 시각주의를 해체합니다. 또한 그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진, 지도, 언어, 드로잉 등으로만 그 흔적을 전달하며, 예술의 결과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미학을 보여줍니다.

자연의 시간성과 반복의 철학

리처드 롱의 예술 세계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자연의 시간성입니다. 그는 자연이 인간과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며, 예술이 그 시간 안에서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의 설치 작업은 대부분 영구적이지 않으며, 자연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사라지거나 변화합니다.

그의 Stone Circle이나 River Avon Mud Drawings 같은 작업은 대지의 재료로 만든 조형물이거나, 자연물을 이용한 회화적 행위입니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흩어지고, 물에 씻겨 없어지며, 그 과정을 사진이나 문장으로만 남기게 됩니다. 그는 이를 ‘자연의 일부로서 예술이 사라지는 방식’이라 말했습니다.

또한 리처드 롱은 반복과 단순함이라는 미학적 전략을 통해 자연과 인간, 시간의 관계를 사유합니다. 원, 선, 나선, 대칭 같은 기하학적 형식은 인류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조형 언어이며, 그는 이를 가장 원초적인 자연적 감각과 결합해 사용합니다. 그가 반복적으로 만드는 ‘돌로 만든 원’은 단순한 형태이지만, 걷는 동안 느낀 시간, 장소의 공기, 주변의 기후까지 모두 포함된 ‘시간적 조형물’입니다.

리처드 롱은 이러한 작업을 통해 예술을 일시적인 사건, 체험, 기억으로 전환시키며, 관람자의 사유와 상상을 자극합니다. 그는 “나는 산을 옮기지 않는다. 나는 산을 걷는다”라고 말하며, 거대한 자연 앞에서 예술이 취할 수 있는 겸허하고도 명상적인 태도를 실천합니다.

비물질적 예술의 확장 – 언어, 지도, 사진의 기록성

리처드 롱은 예술이 반드시 물리적인 오브제로 존재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작품의 핵심이 행위와 시간, 장소에 있다고 생각했고, 기록으로서의 예술을 중요한 매체로 활용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걷기라는 실재적 행위를 기반으로 하지만, 전시장에는 종종 사진, 텍스트, 지도가 전시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여행한 경로를 지도에 선으로 그리거나, 자연 속에서의 감정과 풍경을 짧은 시처럼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이런 방식은 ‘현장성’을 보존하면서도 관람자에게는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는 전략입니다. 이러한 텍스트는 시처럼 압축적이며, 간결한 언어 속에 시간, 감정, 공간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그의 예술은 개념미술, 대지미술, 퍼포먼스 아트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적 특성을 보이며, ‘비물질적 예술’의 대표적 사례로도 평가받습니다. 그는 “나는 여행하고, 그것을 예술로 바꾸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하며, 예술의 조건을 다시 묻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그의 작업은 환경예술, 생태미학, 관계미술의 선구적 형태로 인식되며, 예술이 어떻게 자연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지, 인간이 자연과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남아 있습니다.

리처드 롱은 ‘걷기’라는 일상적 행위를 예술의 중심으로 삼아, 인간과 자연, 시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시각적 조형을 넘어서, 체험과 기억, 장소성과 시간성에 뿌리를 둔 사유적 예술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자연 속에서 행위하고, 남긴 흔적을 기록하며, 예술을 삶의 흐름과 동행하게 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이 물질적 생산을 넘어, 의미와 시간의 흐름, 인간 존재의 감각을 사유하는 장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