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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세라의 물질성과 무게의 조형 언어

by memo5983 2025. 6. 12.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1938~2024)는 20세기 후반 이후 현대 조각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 미국의 대표적인 미니멀리스트 조각가입니다. 그는 산업용 강철, 납, 고무, 콘크리트와 같은 무거운 재료를 활용해 조각의 물질성과 공간성, 중력과 균형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특히 그의 작업은 시각 중심의 조각 관람에서 벗어나, 관람자의 신체가 직접 공간 안으로 들어가 감각을 경험하도록 설계된 구조적 조형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리처드 세라의 조형 언어가 지닌 물질성과 무게, 공간과 관람자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강철의 질량 – 물질성의 재발견

세라는 초기 작업부터 일관되게 ‘물질 자체’에 집중해 왔습니다. 그는 조각이란 “형태가 아니라 무게로 기억된다”라고 말하며, 물성이 지닌 본질적인 성질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산업용 강철은 그의 대표적인 재료로, 절삭되지 않은 거대한 강판을 곡선 혹은 직선 형태로 세우거나 기울여 설치하여, 중력과 균형의 긴장감을 시각화시켰습니다.

대표작 “Torqued Ellipses” 시리즈는 거대한 곡면 강철판을 비틀고 구부려 만든 공간 조형으로, 관람자가 내부를 걸으며 구조물의 스케일과 곡률을 체험하도록 유도합니다. 이 작품은 외형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안으로 들어가 몸으로 경험하는 감각적 조각입니다. 강철의 표면은 거칠고, 냉정하고, 단단하며, 시간에 따라 녹이 슬고 색이 변하는 유기적 특성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세라는 조각이 단지 시각적 형태나 미적 구성의 대상이 아닌, 재료 자체가 가진 중량감, 저항, 밀도를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미니멀리즘의 시각적 단순성에서 벗어나, 오히려 조각의 원초적인 ‘존재감’으로 되돌아가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공간을 조각하다 – 신체성과 장소 특정성

세라의 조각은 특정 장소를 고려해 제작되는 ‘사이트 스페시픽(site-specific)’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의 크기, 바닥의 기울기, 벽의 재질, 조명의 방향 등 모든 요소가 조각의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관람자는 작품을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조자가 아니라, 그 내부를 이동하고 체험하며 공간 속에서 조각과 관계를 맺는 주체로 전환됩니다.

“The Matter of Time”(2005)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에 영구 설치된 대형 철 구조물 시리즈로, 관람자는 다양한 곡선 구조물 사이를 거닐며 시야가 열렸다가 좁아지고, 구조에 의해 동선과 감각이 제어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설치 방식은 조각이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조각화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세라는 조각이 인간의 신체를 다시 자각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그의 작업은 관람자가 거대한 물질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의 몸, 위치, 균형, 방향성을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들어줍니다. 이는 조각이 단지 물건이 아닌, 경험의 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설치 현장 자체를 ‘조각적 조건’으로 간주하며, 작품이 공간과 영구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계획합니다. 이로 인해 그의 작업은 많은 경우 해체나 이동이 불가능하며, 장소와 결합된 조각입니다.

균형과 위태로움 – 감각의 긴장과 심리적 반응

리처드 세라의 조각은 단지 물리적 구조물에 그치지 않고, 관람자에게 심리적 긴장감과 감각적 충격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거대한 강판이 기울어진 채 서 있거나, 곡선 형태로 둘러싸여 있을 때, 관람자는 그 아래를 지나며 압박감, 불안, 두려움, 또는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미적 감상이 아닌, 몸과 감정이 동시에 반응하는 감각적인 구조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세라가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관람자가 공간에서 긴장을 느끼는 순간, 조각은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라고 말하며, 조각이 인간의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촉매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조각은 무겁고, 거대하며, 위협적인 동시에, 공간 속에서 존재의 미세한 변화를 감각하게 만드는 도구로서 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업은 현대사회의 구조물과 산업화된 재료에 대한 재해석으로도 읽혀집니다. 철과 콘크리트, 무게와 중력은 산업사회의 상징이기도 하며, 세라는 이를 예술로 전환시켜 현대 문명의 물질적 언어를 시각화시켰습니다. 동시에 그는 인간과 환경, 물질 사이의 관계를 철학적 수준으로 확장하며, 조각을 존재론적 사유의 대상으로 끌어내었습니다.

 

리처드 세라는 조각을 통해 물질의 본질과 무게, 공간의 구조와 감각의 작동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업은 시각 중심의 미술 감상에서 벗어나, 몸과 공간, 물질과 감각이 만나는 복합적 체험을 유도하며, 조각을 삶과 환경의 일부로 끌어들입니다.

그의 무거운 강철 구조물은 단순한 물체가 아닌, 인간의 인지와 감정을 자극하는 구조적 언어이며, 현대 조각이 어떻게 존재와 공간, 감각과 사유를 새롭게 결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입니다. 세라의 조각은 조용하지만 무겁게, 관람자의 몸과 의식을 흔들며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겨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