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기(Park Hyun-Ki, 1942~2000)는 한국 현대미술에서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작가로, 조각과 영상, 설치를 융합한 실험적 작업을 통해 미디어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를 미술 매체로 수용하기 시작하면서, 자아와 시선, 실재와 허상의 관계를 탐구하였고, 특히 모니터, 거울, 돌, 사진 등 다양한 매체 간 상호작용을 통해 관람자에게 감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 글에서는 박현기의 초기 비디오 아트 실험이 지닌 미학적 특성과 조형적 전략, 그리고 한국 미디어아트 형성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봅니다.
비디오의 확장 – 매체로서의 실험성과 존재 탐구
박현기의 작업은 전통 조각의 물성에서 출발했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비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공간과 존재, 자아에 대한 깊은 질문으로 확장됩니다. 그는 비디오를 단순한 기록 도구나 정보 전달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화면 속 ‘이미지’와 현실 공간의 ‘물질’이 충돌하거나 상호작용하는 지점을 예술적 실험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대표작 “TV Stone Pagoda”(1978~) 시리즈에서는 실제 돌 위에 텔레비전 모니터를 올려놓고, 그 화면 안에 또 다른 돌이 비치는 영상을 반복 재생합니다. 이 반복적 구조는 실재하는 물체와 이미지, 전자적 시공간과 물리적 현실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며,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박현기는 이러한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물질과 이미지, 현실과 허상의 경계를 사유하게 만듭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서 흔하지 않던 비디오 장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기술의 미술적 가능성을 실험했습니다. 비디오라는 매체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었고, 박현기의 작업은 매체가 예술의 표현 수단이자, 그 자체로 철학적 성찰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전례 없는 시도였습니다.
비디오는 시간성과 반복성, 즉각성과 편집 가능성을 지니는 매체입니다. 박현기는 이 점에 주목하며 단순히 ‘보여주는 영상’이 아닌, 존재를 끊임없이 되비추고 순환시키는 장치로 사용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존재의 재현’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구성’에 대한 조형적 실험이었습니다.
거울과 모니터의 반복 구조 – 자아와 인식의 해체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는 단순한 시청각적 장치를 넘어서, 자아와 타자, 내면과 외부 세계의 관계를 구조화하는 장치로서 기능합니다. 그는 종종 모니터와 거울, 사진, 돌을 병치하며, 이들이 서로를 반사하고 반복하는 구조를 통해 자아 인식의 복잡성을 조형적으로 탐구했습니다.
대표작 “Video Inclining Water”에서는 물이 흐르는 영상을 수조 속 실제 물과 함께 설치함으로써, 관람자가 어떤 것이 실재이고 어떤 것이 영상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는 인간의 인식 체계가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의존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며, 영상이라는 매체가 현실을 왜곡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줍니다.
또 다른 작품 “Self-Camera-Shadow” 시리즈에서는 카메라와 모니터,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되비추는 장치를 만들고, 관람자가 자신의 이미지와 시선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응시하게 합니다. 이는 ‘보는 나’와 ‘보여지는 나’, ‘인식하는 자아’와 ‘대상화된 자아’ 사이의 미묘한 긴장을 드러냅니다.
박현기의 작업에서 반복은 단지 조형 구조의 수단이 아니라, 자아의 불안정성과 존재의 파편성을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그는 모니터 속 영상이 계속 반복되고, 거울이 이미지를 반사하며, 그 안에서 관람자 자신이 포함되는 구조를 통해 현대인의 자아 인식 구조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서구의 비디오 아티스트들 ― 나미 준 파이크, 브루스 나오만, 댄 그레이엄 ― 의 흐름과 연결되지만, 박현기만의 미학은 동양적 사고와 수행적 조형성에서 비롯된 독자적인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한국 비디오 아트의 지평을 연 작가 – 동양성과 매체성의 융합
박현기의 작업은 단지 새로운 매체의 도입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동양적 사유 방식과 기술 매체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는 비디오라는 서구적 기술 매체를 차용하면서도, 그 안에 ‘비움’, ‘순환’, ‘무한성’ 같은 동양 철학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주입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돌과 텔레비전의 결합은 단순한 소재의 병치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영원의 상징, 물질성과 비물질성의 대비를 조형 언어로 구현한 것입니다. 돌은 고정되고 물리적인 전통의 상징이며, 텔레비전은 변화하고 전자적인 현대의 상징입니다. 이 둘의 병치는 전통과 현대, 영원과 순간, 자연과 기술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로 존재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또한 박현기는 한국 전통 철학과 불교적 수행을 바탕으로 한 ‘시간성’에 주목했습니다. 그의 영상 작업은 종종 ‘느림’과 ‘정지’를 강조하며, 관람자에게 사유의 시간을 유도합니다. 이는 소비적 미디어 콘텐츠와는 완전히 다른 리듬을 지니며, 예술이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감각과 존재를 되묻게 하는 도구임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비디오 아트는 1970~80년대 초반까지도 생소한 영역이었으나, 박현기의 작업은 이 영역의 가능성을 최초로 개척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그는 전시, 국제 교류, 강의 활동 등을 통해 후속 세대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 한국 미디어아트의 근간을 형성한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그의 작업은 단지 기술적 실험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과 시각적 수행이 결합된 예술로서, 예술이 동시대 사회와 인간 존재의 깊이를 어떻게 사유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전범입니다.
박현기는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기술 매체를 통해 존재, 자아, 인식, 시간성이라는 근본적인 주제를 조형적으로 탐구한 예술가였습니다. 그는 비디오, 모니터, 돌, 거울, 거듭되는 영상 구조를 통해 관람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되묻고, 예술이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실천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단순히 매체 실험에 그치지 않고, 동양철학과 미디어 기술, 설치 조각의 융합을 통해 현대미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한국 미디어아트의 정체성과 철학을 고민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점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