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호(Do Ho Suh, 1962~ )는 '집 짓는 작가'라 불리기도 하는 동시대 미술에서 공간과 정체성, 기억을 주제로 활동하는 백남준을 잇는 대표적인 한국 작가입니다. 2001년 제49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관 대표로 참가해 그 이름을 세계에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면서도, ‘집(house)’이라는 구조적 개념을 반복적으로 다루며, 개인과 집단, 장소와 이동, 물리적 구조와 심리적 공간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특히 반투명한 천으로 만든 ‘이동 가능한 집’ 시리즈는 동양적 섬세함과 현대적 이동성, 그리고 이주민으로서의 자아 성찰을 조형적으로 담아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본 글에서는 서도호가 설치미술을 통해 구현한 ‘집’의 개념과 그 속에 담긴 기억의 층위, 그리고 공간의 미학에 대해 살펴봅니다.
집의 조형 – 물리적 장소에서 기억의 공간으로
서도호의 작업에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의 기억과 정체성이 쌓이는 물리적 구조이며, 동시에 감정과 시간의 축적을 담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은 이름 그대로 집 속에 집을 품은 형태의 작품으로 서울의 한옥과 미국식 타운하우스를 천으로 재현하고, 그 둘을 겹쳐 배치함으로써 물리적 집과 문화적 충돌, 정체성의 이중 구조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모습입니다.
이 작품이 재료는 한복의 재료인 은조사로서 속이 비치는 은조사와 폴리에스터를 이용해 한옥집에서의 추억과 기억을 보여주었으며 여러 도시로 이동하며 정체성을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집이 단지 건축적 공간이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기억의 저장소’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서도호는 자신의 유년기 기억과 공간적 경험을 반투명한 천으로 재현함으로써, 그 공간이 현재와 과거, 실재와 허상 사이에 위치하도록 설계합니다. 관람자는 그의 작품 안에서 집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집을 ‘통과’하게 되며, 이로써 공간은 체험적이고 감각적인 기억의 장으로 전환됩니다.
그의 작업은 이주, 유학, 이방인 경험에서 비롯된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하면서도, 세계화 시대의 보편적 정체성 문제를 사유하게 만듭니다. 서도호의 ‘집’은 정착이 아닌 이동과 유동의 상징이며, 이는 곧 현대인의 실존 조건과 연결됩니다.
기억의 구조 – 투명성과 겹침의 미학
서도호의 설치 작업은 종종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실물 크기의 집 형태로 구성됩니다. 이 천은 폴리에스터 또는 나일론 소재로, 전통적인 구조물의 형태를 정밀하게 따라가되,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접히고 이동 가능한 성질을 지닙니다. 이는 곧 기억의 특성 ― 선명하지만 흐릿하고, 존재하지만 사라지는 ― 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장치입니다.
그는 ‘공간은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라고 말하며, 그 기억은 투명하고, 때로는 서로 겹치며, 고정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그의 천 집 작업은 하나의 구조 위에 또 다른 구조를 겹쳐 배치하거나, 공간 내부를 천천히 거닐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관람자가 자신의 속도와 시선에 따라 기억을 구성하는 체험을 하게 만듭니다.
작품 “Seoul Home/L.A. Home/New York Home/Baltimore Home/London Home/….” 시리즈는 하나의 구조물이 전 세계 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장소와 맥락을 달리하며 다시 설치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같은 구조물이지만,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며, 이는 기억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맥락 속에서 재해석되고 재구성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서도호는 이러한 반복과 겹침, 이동의 구조를 통해 관람자에게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기억의 층위를 함께 경험하게 만듭니다. 이는 동시대 미술에서 ‘비물질성’과 ‘시간성’, ‘관계성’이라는 개념을 체현하는 중요한 작업으로 평가받습니다.
개인과 집단, 몸과 공간의 관계
서도호의 작업에서 집은 단지 개인의 정체성만을 드러내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는 집을 통해 집단적 기억과 사회적 관계성도 함께 탐구합니다. 대표작 “Some/One”은 군복 모양의 조형물로, 수만 개의 군번줄(dog tag)을 이용해 병사들의 정체성과 희생을 조형화한 작품입니다. 이 작업은 ‘집단’이라는 이름 아래 익명화되는 개인,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개인이 지니는 모순된 위치를 시각화합니다.
또한 “Floor”는 수천 개의 미니어처 인간 형상 위에 강화 유리판을 설치해 관람자가 그 위를 걷도록 한 작품으로, 개별적 존재 위에 사회가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작업은 공간과 몸, 개인과 구조 사이의 관계를 물리적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설치미술의 강점을 극대화합니다.
서도호의 조형 언어는 ‘몸’과 ‘공간’ 사이의 물리적 긴장을 감각화하며, 이는 그가 천을 재료로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천은 쉽게 접히고 펼쳐지며, 피부처럼 유기적인 재질로 작용하면서, 공간이 단단한 벽이 아니라 유동하는 구조임을 드러냅니다. 관람자는 그의 작업 안에서 공간과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기억의 감각적 재구성 과정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됩니다.
서도호는 ‘집’이라는 주제를 통해 현대인의 정체성과 기억, 이동성과 소속감, 공간과 시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조형적으로 풀어낸 예술가입니다. 그의 작업은 실재하는 구조물이자, 감각적 기억의 매개체이며, 사회적 관계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그의 설치미술은 고정된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관람자 각자가 경험과 시선을 통해 새롭게 구성하는 ‘열린 구조’의 작품입니다. 이는 동시대 미술에서 예술의 역할이 전달에서 참여로, 재현에서 체험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자, 예술이 어떻게 삶의 기억과 사회적 질문을 통합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중요한 작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