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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서니 곰리의 인간 형상과 공간적 존재성

by memo5983 2025. 6. 17.

앤서니 곰리(Anthony Gormley, 1950~ )는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 조각가로, 인간 형상을 중심에 둔 설치와 공간 조형을 통해 ‘존재란 무엇인가’, ‘신체는 어떻게 공간과 관계를 맺는가’를 탐구해 왔습니다.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인체 재현을 넘어서, 신체가 지닌 물리적, 심리적, 철학적 의미를 시각화하며, 관람자에게 공간 속에서의 자각과 존재의 체험을 유도합니다. 곰리는 자신의 몸을 본떠 만든 금속 조형물과 건축적 설치를 통해, 몸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머무는 장소’ 임을 강조합니다. 이 글에서는 곰리의 인간 형상 조각작품이 어떻게 공간적 존재성을 표현하고, 관람자의 감각과 인지를 어떻게 확장시키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인체의 형상화 – 신체는 조각의 출발점

앤서니 곰리의 조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요소는 바로 ‘인체’입니다. 그는 전통적 인체 조각처럼 외관의 정교한 재현보다는, 신체가 지닌 구조, 밀도, 내부 공간에 집중합니다. 대표작 “Bed”(1980–81), “Iron: Man”(1993), “Another Place”(1997)는 모두 본인의 몸을 본떠 제작된 작품들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형태를 물질로 치환해 시각화한 사례입니다.

특히 곰리는 신체를 ‘경험의 용기’라 부르며, 조각이 단지 보는 대상이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확장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석고로 자신의 신체의 윤곽을 본뜬 후, 철이나 납 등의 금속으로 주조하고, 이를 실내외 공간에 설치하여 관람자가 작품과의 거리, 크기, 방향성을 통해 자기 존재를 감각적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몸을 단순히 시각적 재현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존재의 측정 도구로 전환하는 방식입니다. 즉, 곰리의 조각은 ‘인체 조형’이 아니라, ‘존재의 기록’으로 기능하며, 인간이 공간 안에서 어떻게 위치하고 연결되는지를 질문합니다.

공간과 관계 – 장소 특정성과 신체 감각

곰리의 작업은 대개 특정 장소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는 조각을 단순히 공간 안에 놓는 것이 아니라, 공간과 조각, 관람자 사이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설계합니다. 특히 넓은 야외에 인간 형상 조각을 대량 설치함으로써, 공간이 지닌 물리적·심리적 성격을 시각화하는 작업을 진행해왔습니다.

대표작 “Another Place”는 영국의 크로스비 해변에 본인의 형상을 본뜬 철제 인물 100여 개를 바다를 향해 세운 설치물로, 밀물과 썰물에 따라 신체가 잠기거나 드러나는 모습이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관람자는 이 작품을 통해 몸이 자연과 시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사라지는가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또 다른 작품 “Inside Australia”(2003)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한가운데 인체 형상을 설치하여, 인간 존재의 미미함과 공간의 광활함을 대조시킵니다. 이처럼 곰리의 작업은 장소와 신체 사이의 긴장을 구성하며, 인간이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조형 언어로 번역합니다.

그는 또한 실내 공간에서도 미로, 격자, 다중 인체 구조를 통해 관람자의 동선과 시선을 유도하며, 조각이 감각의 경로를 설계하는 구조로 작동하도록 만듭니다.

존재와 비움 – 비물질적 감각의 시각화

앤서니 곰리의 조각은 때로는 ‘부재’를 시각화하는 작업으로도 읽힙니다. 특히 “Blind Light”(2007) 같은 설치 작은 빛과 안개로 가득 찬 공간 안에 관람자를 초대함으로써, 신체의 윤곽이 어떻게 지워지고, 감각은 어떻게 재조정되는가를 실험합니다. 이 설치는 내부로 들어가면 주변과 자신의 신체의 윤곽이 보이지 않게 되어, 감각의 경계와 자기 인식의 기준이 흐려집니다.

곰리는 이를 통해 조각이 실체를 구축하는 작업이 아니라, 비워진 공간에서 감각과 인식이 스스로 형성되는 구조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조각은 더 이상 단단한 물체가 아니라, ‘존재를 사유하게 하는 구조적 틀’로 확장되어 해석됩니다.

그는 철, 강철, 납, 유리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지만, 그 물성은 형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일 뿐, 핵심은 관람자의 신체와 인식이 작품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고 자각되느냐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이는 곰리 조각의 철학적 핵심으로, 조각을 통해 관람자가 자신을 감각하게 만드는 예술이라는 목적과 연결됩니다.

결국 그의 작품은 관람자의 참여를 통해 완성되며, 이는 곰리가 동시대 조각을 ‘존재론적 체험’의 장으로 전환시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미학적 성취입니다.

 

앤서니 곰리는 인간의 인체를 조각의 중심으로 삼되, 그것을 단순히 형상의 재현이 아닌 존재와 감각, 공간의 상호작용을 탐구하는 매개로 삼은 작가입니다. 그의 작업은 관람자가 조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인식하며, 관람자 자신의 신체를 통해 공간과 존재를 체험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는 인체의 윤곽적 형상을 통해 인간 정체성을 드러내고, 공간과 감각의 구조를 조각적으로 구성함으로써, 예술이 삶의 본질을 질문하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앤서니 곰리의 조각은 동시대 미술에서 가장 철학적인 예술 언어로,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와 인체 형상의 철학적 해석을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