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니스 쿠넬리스(Jannis Kounellis, 1936~2017)는 이탈리아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운동을 대표하는 작가로, 비전통적 재료와 강렬한 설치 조형으로 20세기 후반 유럽 현대미술에 깊은 인상을 남긴 예술가입니다. 아르테 포베라는 ‘가난한 예술’이라는 뜻으로, 상업화된 미술과 물질주의적 예술에 저항하며, 자연적이고 일상적인 재료를 통해 새로운 조형 언어를 모색한 미술 운동입니다. 쿠넬리스는 이탈리아가 아닌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아르테 포베라의 핵심 작가로 자리 잡았고, 철판, 낡은 천, 석탄, 생나무, 동물 등 비전통적 재료를 이용해 예술의 의미를 확장시켰습니다. 이 글에서는 쿠넬리스의 조형 언어가 어떻게 아르테 포베라 정신과 맞닿아 있으며, 어떤 조형적 실험을 통해 동시대 미술에 영향력을 미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아르테 포베라의 철학과 쿠네리스의 접근
아르테 포베라는 1967년 이탈리아 비평가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에 의해 명명된 미술 운동으로, 고급 재료와 전통 형식에 기반한 미술 제도에 대한 강한 저항을 내포합니다. 이 운동에 속한 작가들은 화려한 기법이나 고급 소재를 거부하고, 흙, 돌, 천, 나무, 철, 유리, 연기, 불, 식물 등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소재를 활용하여 미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습니다.
쿠넬리스는 이러한 철학을 충실히 반영하며, 작품에 주조된 조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회화보다는 설치에 가까운 작업을 지향했고, 물질의 본질적 존재감과 그것이 차지하는 공간을 예술로 전환시켰습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제(1969)에서는 실제 살아 있는 말들이 전시장 안에 배치되어 미술의 장소성과 의미, 관람 행위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는 미술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는가, 어떤 방식으로 감각될 수 있는가를 재정의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쿠넬리스는 "나는 재료가 예술보다 앞선다고 믿는다"라고 말하며, 재료 자체가 상징적이고 시적인 언어를 생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예술가의 표현이 아닌, 재료와 공간이 직접 말하게 하는 조형 방식을 제안했고, 이는 아르테 포베라의 핵심 사유와 연결됩니다.
2. 물성 실험과 공간의 조각화
쿠넬리스의 작업은 ‘물성(materiality)’에 대한 깊은 사유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철판, 낡은 나무, 낙하산 천, 석탄, 옷가지, 새 등 다양한 사물을 직접 공간에 배치하거나 벽에 고정함으로써 조형적 긴장과 의미를 창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물체 간의 대비와 상호작용을 유도하며, 물질이 지닌 역사성과 상징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그의 철판 작업은 산업 사회의 냉혹함과 인간성의 부재를 암시하기도 하며, 낡은 천과 석탄은 가난, 노동, 인간 조건에 대한 시적 은유로 작동합니다. 이러한 조합은 시각적인 화려함이 아니라, 감정적, 감각적 울림을 통해 관람자에게 사유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쿠넬리스는 단순히 조형물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공간을 조각처럼 구성했습니다. 그는 전시장을 마치 무대처럼 연출하여, 관람자의 동선과 감각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습니다. 그의 공간은 텅 빈 듯하지만, 재료 간의 관계성과 역사성, 무게감이 밀도 높게 배치되어 있어, 정적인 감상이 아니라 ‘조용한 충돌’이 일어나는 장소로 기능합니다.
이처럼 쿠네리스의 작업은 단지 설치미술이 아니라, 공간에 시간성과 서사성을 부여하는 조형으로 확장되며, 관람자가 직접 느끼고 사유하도록 유도하는 ‘체험적 미술’로 발전했습니다.
3. 조형 언어의 시성(詩性)과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
쿠넬리스의 조형 언어는 단순히 재료 실험이나 설치기법에 그치지 않고, 시적 이미지와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가집니다. 그는 사물 간의 충돌과 대비, 균형과 불균형을 통해 추상적이지만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시적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이를 통해 미술이 감각적 자극을 넘어, 정서와 상상을 자극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의 영향은 동시대 설치미술 작가들뿐 아니라, 현대 조각의 공간 해석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쿠넬리스는 조각이 단지 입체 조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감각적이고 개념적인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이는 리처드 세라, 아니시 카푸어, 올라퍼 엘리아슨 등 이후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그는 예술의 권위나 제도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형식만 실험하는 경향에 반해, 예술이 사회적, 역사적, 철학적 질문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태도를 일관되게 유지했습니다. 쿠네리스에게 예술은 감상 이전에 존재와 존재의 자리에 대한 탐구였으며, 사물과 공간을 통해 말해지는 '침묵의 언어'였습니다.
얀니스 쿠네리스는 아르테 포베라 운동의 정신을 가장 극명하게 구현한 작가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조형 언어를 통해 물질의 존재성과 공간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했고, 예술이 기술이나 형식의 결과물이 아닌, 삶과 존재에 대한 성찰이 될 수 있음을 실천했습니다.
그의 작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물성 중심의 미술, 설치미술, 사회적 공간 조형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쿠넬리스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식, 조형적 침묵의 미학을 통해 현대미술에 깊은 울림을 남긴 조형 철학자라 할 수 있습니다.